失败了呀。
据说最早的38度线还是沙俄和日帝在朝划分势力范围时日方提出来的。
日清战争以后,日帝将清国势力驱逐出朝鲜。但在日本《还辽》以后,沙俄势力进入朝鲜同日本争夺。1896年,为应对日帝谋略的《乙末事变》【明成皇后就在那时被日帝杀害,高宗皇帝被软禁事实】 高宗跑进了俄国大使馆,史称《俄馆播迁》。
1896年2月10日,俄国公使馆突然以“加强公使馆防御”为由,从停泊在仁川的俄国军舰调来150名士兵和1门大炮开赴朝鲜首都汉城(今韩国首尔)。而高宗已经准备就绪,他和王太子李坧等人借用了宫中内命妇的轿子,准备带着玉玺趁机逃走。当时景福宫的看守非常严密,巡警数百人把守宫门,核查出入。当时高宗晚睡晚起,守卫已经习惯了,所以高宗一行准备在清晨出逃。1896年2月11日(农历十二月二十八日,乙未年小除夕)凌晨,高宗命人乘坐轿子出宫,然后又回来,又出宫,如此往返三次,以麻痹守卫。等到高宗在清晨乘坐这顶轿子出逃时,守卫根本就不以为意了,再加上他知道高宗向来起得很晚,不可能在清晨活动,更放松了警惕,于是没有检查就让高宗、王太子出了建春门,两顶轿子匆匆朝位于城西贞洞的俄国公使馆奔去。另外,据朝鲜官员尹致昊透露,当天晚上高宗生母骊兴府大夫人和兴宣大院君(高宗生父)的一个小妾在宫中监视高宗举动,高宗则彻夜与她们闲聊他小时候的事,她们到凌晨2点才聊完睡觉,高宗行动时她们正在酣睡,这也是高宗的计划得手的一个步骤。[3] 王太后洪氏、王太子妃闵氏则逃到了庆运宫(今德寿宫)。晨7时,高宗抵达俄国公使馆。李范晋等人在俄国公使馆等待已久,听到高宗来到俄国公使馆的消息后,和韦贝尔一起急忙迎接。此时的高宗“面如白纸,战栗不已”[4] ,沿途的慌张也就可想而知了。
高宗“播迁”到俄国公使馆以后,连续下达多个诏敕。根据高宗的诏敕,亲日内阁大臣全部罢免,并下令重新追究“乙未事变”的责任,将总理大臣金弘集、内部大臣俞吉濬、军部大臣赵羲渊、农商工部大臣郑秉夏、法部大臣张博列为“逆贼五大臣”而加以逮捕,同时命金炳始为内阁总理大臣,重新组阁。朝鲜百姓听说后,欢呼雀跃。当时内阁诸大臣还在景福宫修政殿内议事,宫内府大臣李载冕首先跑来,告知高宗已逃之事。内部大臣俞吉濬听说后大怒道:“汝为宫内大臣,失君之变,汝尚何颜来告!”说罢就扇了李载冕两耳光。李载冕说:“宫门把守,内部大臣掌之。”话还没说完,就听到宫外军民呼声喧天,警务官安桓率领巡检来抓人。金弘集、郑秉夏先被捕,两人被塞进轿子里,七八名巡警迅速抬着轿子移送到警务厅。俞吉濬被捕后,被巡检押送步行至光化门,那里有日军驻地。俞吉濬用日语大声呼喊,日本兵迅速来救援,将俞吉濬从巡检手中抢走了。李完用私下命令将金弘集、郑秉夏杀死,安桓手下的总巡苏兴文就将二人于警务厅门前的小石桥上用剑刺死了。[5] 接着,二人被暴尸在汉城钟路。史书记载“都人怨弘集主剃令(即断发令),争掷瓦砾,肢体碎裂,有割其肉生啖者”。[6] 亲日内阁的度支部大臣鱼允中则在流亡回乡的途中被百姓打死,外部大臣金允植亦被逮捕并流放济州岛。对于其他亲日派则要求朝鲜军民“不问长短,即刻斩首来献”[7] ,于是俞吉濬、赵羲渊、张博等30多名亲日派逃到日本公使馆避难并亡命日本。至此,甲午六月以来日本苦心经营的朝鲜亲日政权完全瓦解,日本在朝鲜的扩张得到了遏制。李范晋、李完用等亲俄派入主中枢,朝鲜半岛出现了亲俄政权。
“俄馆播迁”以后,亲俄内阁宣布废除断发令,剃发易服“从便为之”。又调回镇压义兵运动的兵力,对义兵以怀柔政策为主,使义兵逐渐解散。同时免征一切未收和未纳的贡赋,以期挽回民心。朝鲜高宗为了避免日本人的迫害,再加上俄国人和亲俄派的强迫胁迫,仍然住在俄国公使馆内,并将俄国公使馆称为“行在所”。据当时任俄国驻华公使馆秘书的索洛维约夫称,“朝鲜所有政府部门都在(俄国公使馆中)被屏风隔开的大厅里办公,当内阁召开会议时,把屏风撤走。由于这种形势,俄国政府在汉城完全自由地发号施令。
新成立的朝鲜亲俄政府为了报答“俄馆播迁”的大恩,开始不断向俄国出卖国家主权,在卖国方面与之前的亲日政府绝无二致。1896年4月,俄国得到了咸镜北道的镜城和钟城的矿山采掘权,同年9月,俄国获得了茂山、鸭绿江与郁陵岛的森林采伐权。在尼古拉二世举行加冕礼时,朝鲜政府亦派遣闵泳焕出使俄国,和俄国达成秘密协定,将朝鲜的军事和财政交与俄国控制。除此之外,美国、英国、德国、法国等欧美列强也趁火打劫,在“俄馆播迁”期间攫取了朝鲜大量的铁路敷设权、矿山采掘权等经济利权。对于日本,亲俄政府仍然保持外交关系,但态度明显强硬,力求对等外交,对于日军镇压义兵运动中伤亡人员表示慰问,同时又宣布镇压义兵“由我警务厅另行查办”,并且要求日本撤离驻扎在汉城的兵营,甚至还对在汉城的日本报刊“语多不韪”、“语涉失实”的报道提出抗议[13] ,这在俄馆播迁以前是不可想象的。当然,这也是以俄国为后盾的结果。
俄馆播迁既久,朝鲜臣民亦希望高宗尽快回宫,金炳始、郑范朝等大臣纷纷上疏表达这种愿望,甚至亲卫第一联队第三大队长李根溶(李根泽)、第四大队长徐廷圭等人于1896年11月试图劫持高宗回宫,但事泄未遂。不过,也有观点对急于回宫之议不以为然,如1897年2月13日的《独立新闻》评论认为,“尽早还御(回宫)于国体而言理所当然”,但既然朝鲜军队还是无力保护君主,因此认为不是请求回宫的时候。[14]
1897年2月18日,朝鲜政府突然将回宫的决定告知俄国方面,令俄国颇感意外。俄国驻朝公使韦贝尔认为一向优柔寡断的高宗之所以急于回宫,除了民族意识高涨外,还可能受到日本的影响。[15] 日本驻朝公使加藤增雄则认为这是出于朝鲜官民对回宫的渴望。[16] 清朝驻朝领事唐绍仪指出:“窃观韩王此次迅速返宫,皆迫于臣民之呼吁,究非王之本心。”[17] 不管怎样,高宗一行于1897年2月20日正式离开俄国公使馆,移驾庆运宫(今德寿宫),结束了一年之久的流亡生涯。1897年10月12日,高宗自称皇帝,改国号称“大韩帝国”,朝鲜历史翻开了新的一页。
然后,日俄战争俄国输了……朝鲜历史又翻开了一页---日帝强占期。
1905年,日帝在朝鲜设置《统监府》,开启了朝鲜民族悲惨的长长四十年血泪史,1907年以海牙秘史事件强迫高宗退位,最后在1910年悍然吞并了朝鲜,彻底沦为日本殖民地。
海牙秘史事变,高宗退位和丁末7条约相关↓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침략자들은 불법비법의 조약들을 날조,강압체결함으로써 조선을 저들의 공고하고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미쳐날뛰였다.《정미7조약》도 일제침략자들이 저들의 식민지지배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날조한 불법비법의 조약들중의 하나이다.
用武力强占我国的日帝侵略者们捏造不法非法的条约,强压缔结来妄图把朝鲜巩固作为永远的殖民地。《丁末7条约》也是日帝侵略者们为了更强化其殖民地支配权捏造的不法非法的条约之中的一个。
《을사5조약》의 날조로 조선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침략자들은 저들의 조선침략을 《합법화》하고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있었다.
捏造了《已巳5条约》把朝鲜的外交权完全夺走,设置《统监府》日帝侵略者把他们对朝鲜的侵略合法化,为更加强化对朝鲜的殖民地统治的用尽各种手段和方法。
바로 이러한 때인 1907년 6월 일제의 조선침략을 반대하는 우리 인민의 독립의지와 민족적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한 《헤그밀사사건》이 발생하였다.
就在1907年6月,发生了完全誇示反对日帝侵略朝鲜的我们人民的独立意志和民族气概的《海牙密使事件》。
파렴치성과 날강도성이 체질화된 일제침략자들은 이 사건을 고종황제를 페위시키고 또다른 침략조약을 손쉽게 날조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획책하였다.
骨子里不知廉耻,白眼狼的日帝侵略者们以此事为借口废黜了高宗皇帝,又以为轻而易举的找到了再搞一个侵略条约,谋划对朝鲜强化殖民地支配的契机。
당시 《조선통감》이였던 이또는 《헤그밀사사건》에 대하여 통보를 받자 고종황제를 찾아가 《이러한 위험한 수단으로써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고 하는것은 일본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는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대한 책임은 완전히 페하 한 사람에 돌아간다는것을 선언하는바이다.》고 망발을 줴쳐댔다.
当时的《朝鲜统监》伊藤博文接到《海牙密使事件》的通报,找到高宗皇帝吐出妄言:“用这样危险的手段意图拒否日本的保护权相当于对日本公开的宣战布告…对此的责任完全归于陛下一人。”
이렇게 고종황제를 위협공갈하던 끝에 일제침략자들은 고종이 《헤그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황위를 순종에게 양위하라고 강박하였다.
这样威胁恐吓高宗皇帝后,日帝侵略者以高宗皇帝要为《海牙密使事件负责》而强迫高宗把皇位让给纯宗。
일제침략자들의 강요에 의해 고종황제는 1907년 7월 19일 황태자에게 황제를 대리하도록 하였다.말그대로 고종황제는 황위를 완전히 양위한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하여금 림시대리하도록 하였다.
由于日帝侵略者的强迫,高宗皇帝在1907年7月19日让皇太子代理皇帝。如此,高宗皇帝没有完全的让位给纯宗,而只是临时让纯宗代理。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침략자들은 쾌재를 올리며 이미 짜놓은 각본에 따라 다음단계에로 넘어갔다.7월 23일밤 일제침략자들은 매국역적 리완용을 불러다놓고 저들이 새롭게 작성한 침략조약인 《일한협약안》을 내리먹이였으며 24일 《한일협약》이라는것을 날조해내였다.
日帝侵略者拍手称快,然后按照早就草拟好的脚本进行下一阶段。 7月23日晚,日本侵略者把卖国逆贼李完用叫过来传达新作成的侵略条约《日韩协约案》,24日捏造成了《韩日协约》。
이것이 바로 《정미7조약》이였다.《정미7조약》의 날조를 통하여 일제는 법령의 제정,중요한 행정상의 문제,조선인고등관리의 임명과 철직 등 조선봉건왕조의 내정관리전반을 완전히 장악,통제할수 있게 되였다.
这就是《丁末7条约》。通过捏造 《丁末7条约》,日帝得以完全的掌握,统制了法令制定,重要的行政上的问题,朝鲜人高等官吏的任命和撤职等朝鲜封建王朝的全盘内政管理。
이렇게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데 이어 내정권까지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这样夺取了朝鲜的外交权,完全掌握了内政权,日帝就更加强化了对朝鲜的殖民地支配权。
그러나 《정미7조약》은 아무런 법적효력도 가지지 못하는 불법무효한 허위문서에 불과하였다.
但是《丁末7条约》不过是怎么也不会有法律效力,是非法无效的虚伪文件。
그것은 우선 이 《조약》이 국제조약의 법률적효력을 확인할 최고주권자나 최고주권기관의 비준도 받지 못한 문서였기때문이다.당시 고종은 황태자에게 황제를 대리시키겠다고 말하였을뿐 그해 8월까지 황제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있었다.그러므로 조약이 법적효력을 발휘하자면 마땅히 고종의 윤허와 서명,옥새날인이 있어야 하였다.일제침략자들이 《정미7조약》의 초안을 비준하라고 강박하였을 때 고종은 윤허도 서명도 옥새날인도 단호히 거절하였다.결국 《조약》에는 매국역적 리완용의 도장만이 찍히게 되였다.
首先这个条约没有得到具有确认国际条约权力的最高主权者和最高主权机关的批准签署。当时高宗只是说让皇太子代理皇帝,到8月还没有退位。所以,条约要发挥法律效力应当有高宗的允许和署名,玉玺捺印。日帝侵略者强迫批准《丁末 7 条约》的草案的时候,高宗断乎拒绝了允许,署名和玉玺捺印。结果《条约》上只盖了卖国逆贼李完用的图章。
또한 《정미7조약》은 아무러한 국제조약체결능력도 가지고있지 않은자들에 의하여 날조된 불법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而且《丁末7条约》怎么样都只是依没有国际条约缔结能力的人捏造的不法文书。
당시 조선봉건왕조에서 국제조약을 체결할 능력은 오직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인 고종황제나 고종의 위임을 받은 전권대표에게만 있었다.
当时在朝鲜封建王朝,有缔结国际条约能力的只有国家的最高统率权者高宗皇帝和高宗委任的全权代表。
이것은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在日本也是如此。
그러나 《정미7조약》은 매국역적 리완용과 이또가 야합하여 날조해낸것이였으며 이자들은 해당 나라의 최고통수권자로부터 아무러한 위임도 받지 못한자들이였다.
然而《丁末7条约》是卖国逆贼李完用和伊藤博文捏造的,这两个人没有得到来自本国最高统率权者的任何委任。
이처럼 《정미7조약》은 아무런 법적효력도 못 가지는 불법비법의 협잡문서였다.일제침략자들은 이 협잡문서를 그 무슨 《합법적인 조약》처럼 휘두르며 조선의 완전강점을 목표로 한 저들의 침략적야망을 실현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这样的《丁末7条约》是怎么也不带法律效力的讹诈文书。日本侵略者把这纸讹诈文书拿着鸡毛当令箭当成《合法条约》,作为他们筹划实现完全强占朝鲜这个侵略野望的目标道路上的垫脚石。
제반 사실들은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제침략자들의 날강도성과 침략성을 낱낱이 고발하고있다.
诸般事实个个都表明了日帝侵略者要把我国变成殖民地的狼子野心的侵略性。
俄国曾经努力过,失败了而已。
日清战争后,日本控制朝鲜,与欧陆列强的俄国产生了直接冲突,这也是近代白人第一次在全面战争中败于非白人国家,失去了远东大片地区(满洲南部)。
双方在满洲地区进行了多次会战,俄国的战线节节败退,最终在奉天会战后被日本逼退至长春,选择了停战。
在朴茨茅斯条约中,俄国承认朝鲜为日本的保护国(即朝鲜属于日本)。
俄国将南满地区的权益转让于日本,俄国与日本平分了清国的整个满洲。
俄国割让萨哈林岛(桦太岛)的一半,并且让出远东州沿海的渔场。
日本于1910年吞并了大韩帝国(朝鲜),朝鲜半岛成为了日本领土的一部分,俄国无法再通过煽动朝鲜内部对抗日本。
俄国能保有北满洲的控制范围直到1918年——赤俄动乱时,在协约国的主导下,全球参与绞杀布党,日本也出兵干涉西伯利亚,顺便也拿下了北满。
日军最远时一度打到贝加尔湖,即便后来俄共收复了远东,但对于满洲也只保有一些铁路沿线的影响力而已。
最终在昭和六年,满洲事变爆发,日本彻底掌控了满洲全境,直到终战后日本退出满洲,且俄国再次进入朝鲜。
沙皇并没有能力与日本争夺满州、朝鲜,布党强一些,但是拿得下也守不住 ,所以他们最终失去了扩张的机会。